난랑비서문 (鸞郞碑序文) / 최치원
난랑비 서문 (鸞郞碑 序文)
國有 玄妙之道 曰風流
국유 현묘지도 왈풍유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말하기를 풍류라 한다.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 三敎 接化群生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 삼교 접화군생
이 종교를 일으킨 연원은 선사[仙家史書]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근본적으로 유 불 선 삼교를 이미 자체 내에 지니어,
모든 생명을 접하여 저절로 감화시킨다.
且如入則 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차여입즉 효어가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집에 들어온 즉 효도하고 나아간 즉 나라에 충성하니,
그것은 노사구-魯司寇(공자)의 교지(敎旨)와 같다.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하염없는 일에 머무르고, 말없이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노자)의 교지와 같다.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모든 악한 일을 짓지 않고 모든 선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
* 풍류(風流)
바람 '풍(風)'자와 물 흐를'유(流)'자가 합쳐져 된 풍류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바람이나 물의 흐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성품이 고지식하지 않고 물과 바람처럼 융통성이 있으면,
더불어 속되지 않고 고상하여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운치와 멋스러움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예술적 심미안을 갖춰 정서적으로 넉넉하며,
다방면의 지식도 풍부하여 어느 자리에서나 실속 있는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다.
따라서 주위에 언제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게 된다.
그러므로 풍류를 아는 사람은 현대적인 지성인이요,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풍류인이란 자유분방한 한량에게 함부로 붙일 별명은 아니 것이다.
풍류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신라의 최치원이 쓴 '난랑비서문'에 처음인 듯하다.
난랑비 서문 (鸞郞碑 序文)
신라의 화랑 난랑을 위하여 만들어진 비석의 해설 부분. 작자는 최치원(崔致遠)이다.
전문은 전하여지지 않고 일부만이 《삼국사기》권4의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조 기사에 인용되어 있다.
진감화상비서(眞鑑和尙碑序)와 같은 최치원의 다른 비서로 미루어본다면 난랑비서는 본래 화랑에 대한 긴 서설과 자세한 행적으로 엮어진 장편의 문장이었으리라고 여겨진다.
내용은 풍류도라는 신라 고유의 가르침이 있어 화랑도는 그 가르침을 받들어 수련한다는 것이다.
선사(仙史)가 전하지 않아 풍류도의 전모를 알 수는 없으나 유·불·도 3교가 기본정신에 있어 상호 모순되기보다는 오히려 일치한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崔致遠, 857∼?)
신라시대의 학자. 경주최씨(慶州崔氏)의 始祖.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최치원(崔致遠)은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24세손이다.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 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 *)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 (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 翰林學士) 수병부 시랑(守兵部 侍郞) 서서감 지사(瑞書監 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 서문(鸞郞碑 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 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 白月 *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 *集)》
《석순응전(釋順應傳)》《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