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이야기

압정(壓鄭)의 결계(結界)를 풀다! / 정도령의 연원지 = 진안 마이산

경성 성진 (鏡惺 聖眞) 2009. 1. 5. 20:02

 

 

          압정(壓鄭)의 결계(結界)를 풀다!

                        / 정도령의 연원지 = 진안 마이산

 

 금일은 저희 계룡정사<鷄龍停舍>(진아眞我와의 만남을 추구하는 수행인들의 모임)회원님들과 진안 마이산에 들려 압정의 결계를 푸는 의식을 하고 왔습니다.

 

 새 시대로 진입이 이미 시작된 작금에있어,  조선왕조 창업 시 무학대사님등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추정되는 압정(壓鄭)의 결계(結界) - 정도령이 출세(出世)하는 것을 막기 위한 비보 - 를 해제시키는 의식을 거행하고 왔습니다.

 

 이 의식의 내면에는 압정의 결계를 풀음으로써, 인류의 의식향상 속도가 빨라지고 많아져 새 시대로의 진입이 더욱 빨라지고, 그 진입에 있어 예상되는 민초들의 희생이 적게 나오라는 기원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마이산 탑사 

 

 

 

                                                     압정의 결계를 푸는 의식 

 

 

 

 

 

 

 

 

 

                                                               숫 마이봉 전경

 

 

 

  마이산은 소백산맥(小白山脈)과 노령산맥(蘆嶺山脈)의 경계에 펼쳐져 있고 진안고원의 중앙에 이름 그대로 '말의 귀(馬耳)'형상을 하고 있는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라 시대는 서다산西多山, 고려때는 용출산聳出山, 조선조 태조 때에는 속금산束金山으로 불려오다가 태종이 산 아래 이르러 관원을 보내 제사지낸 후 그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행설에 따르면 마이산은 암석산으로 木 火 土 金 水로 구성되는 오원기(五元氣) 가운데 金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오행의 상생 상극원리에 의해 금극목(金剋木), 즉 마이산의 금기운이 목기운을 제압하는 격이 됩니다.

 오얏나무를 뜻하는 이(李) 성의 나무목(木) 변은 곧 목기운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씨왕조 후 등극한다는 정도령의 금기운에 대한 대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건국될 무렵 무학대사님을 비롯 이태조등은 반궁수의 핵심이요 이씨를 제압하는 마이산에 대한 비책을 깊숙이 논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이성계가 마이산의 지명을 속금산(束金山)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에서도 여실히 입증됩니다.

 여기서 속금이란 ‘금기운을 묶어둔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 진안의 문인 담락당(湛樂堂) 하립(1769~1823)이 지은 싯구에는 ‘속금산 내에 탑이 여럿 있다(束金山裡塔重重)’는 표현이 보입니다.

 따라서 지난 날 마이산은 속금산으로 명명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미 당시에도 여러 기의 탑이 존재했음을 시사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마이산의 탑 역시 금기운을 제압하기 위한 산천 비보 차원에서 태조의 조탑설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형국론에 따르면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밖에 위치한 지역은 산의 형상이나 물의 흐름이 나란히 왕도에 반기를 들 지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지세를 일러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반궁수(反弓水)’로 풀이했습니다.

 즉 왕도가 있는 한양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는 형국이라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반궁수의 중심에 마이산이 자리합니다.

 금강의 한 발원지로 지목되는 마이산은 바로 반궁수의 화살촉에 비견되기 때문입니다.

 

 

 신라 말부터 고려[高麗] 때까지는 용출산[湧出山]으로써 정동방[正東方]은 경남 가야산[伽倻山]이 있고 정북방[正北方]에는 충남 계룡산[鷄龍山]이 있으며 정남방[正南方]엔 마이산[馬耳山]이 있었다 합니다.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는 이 진안 마이산 용출산[湧出山] 밑에서 등극을 위한 100일 기도를 올리고 꿈속에서 몽금척[夢金尺]을 받은 후에 조선을 창업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태조는 조선왕조 이후의 세상이 금기운인 금강의 발원지라 여기던 이 곳 마이산기운과 이 금강이 태극의 형상으로 감아돌아가는 정도령이 출현한다는 계룡산기운에 대한 절실한 대비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더우기, 본블로그 신법 제일의 기도처 / 제석사편에 나오듯이 계룡산신에게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을 허락을 인가받지 못한 상황에서의 대비책은 더욱 필요했을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연유등으로 정도령의 금기운을 제압하기 위하여 무학대사님등이 주도하여 이 곳 마이산에 탑을 조성하는등의 여러 비보행위를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엄굴 약수 

 

 

 

                                                                          화엄굴

 

 

 

                                                                   화엄굴에서 

 

 또, 아래등의 사료에도 나오듯이 태조의 태를 이 곳 마이산과 한양과의 직선에 위치하는 금산 추부 만인산에 이전한 바도 있습니다.

 

 저희는 이 만인산 태봉은 홰손된지 이미 한참 되었고, 현재 이태조의 태를 보관한 위치는 원래 위치에서 한참거리에 이전되어있어, 이 곳에 대한 대비나 행사를 할 필요성은 없어보여 이 곳에서의 의식은 생략했습니다.

 

 

 

 

 

 

 

                                                            천왕문으로 가는 계단 

 

 

 

 

 

 

  만인산 태실에 대한 기록

 이성계의 태를 만인산에 안치한 것은 태조가 즉위한지 2년째 되는 1393년이다.태조는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고향인 함흥땅에 비장된 태를 만인산에 이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태조의 태실에 관한 초기의 기록은 『태실실록』과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편찬되는 각종 지리지와 읍지에는 만인산 성봉(지금의 정기봉)에 대한 기록이 추가로 등장는데 전문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태조 2년(1393) 계유년에 태조의 태실을 안치하고 진산군을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승격했다. 태종13년(1415)에 다시 군으로 개칭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

“만인산:군의 동쪽 20리에 있다. 성봉(星峯)이 있는데 땅이 후박하고 물이 깊으 며, 봉우리가 기이하고 수려한 것이 연꽃과 같다. 태조의 태를 묻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

“만인산:차령에서 뻗어내렸는데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태조대왕 어태(御胎)를 봉안했다.” 『여지도서』(1759~1765) 18세기 유일한 군현지도인 『해동지도』(1747~1750)에도 동일한 기록이 보이는데 진산군 지도와 함께 연꽃에 비유되는 태실의 지세가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 정조년간의『여지도서』를 비롯, 조선 후기에 편찬되는 『진산군읍지』(정조년간), 『호남읍지』(1871)등에는 만인산을 태실지로 점복한 내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용담답산기에 이르기를, (태실지에) 천마기(天馬旗)가 창을 세워놓은 형태로 안석되어 있었다. 옛날에 담양 세성인(世性人) 전추 (田秋)라는 사람이 그 지총(地塚) 위에 집을 짓고 밭 아래 동네에서 풍족하게 살았다. 태조 등극2년 호우 계유년(393)에 군사람 진순도(陳舜道)가 그 위(태봉)를 점복했다. 태조가 처음에 소문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재신(宰臣)과 더불어 지관(地官)을 파견하여 그것을 보고 오도록 했는데, 지관이 산 위에 이르러 점 지하여 말하기를, ‘아름답도다(佳哉). 이는 만세의 터로구나!’ (此萬世之基也)하고 탄복하여 태를 봉하도록 했다. (중략) 이에 태조가 상을 내려 진순도를 임주사(林州使)로 삼고, 전추 역시 회인현감에 봉하여 전택(田宅)을 하사했다.(중략)

 위의 기록에 의하면 태봉의 본래 주인은 전추라는 인물이고, 그위를 다시 점복한 사람은 진순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왕사 무학이 최초로 태실지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재신과 지관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무학이 직접 내려와 태봉을 살핀 위에 태조에게 조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차로 다려먹으면 건강에 좋다는 입구의 조릿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