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이야기

십바라밀

경성 성진 (鏡惺 聖眞) 2009. 1. 25. 21:28

                                  십바라밀도





십바라밀은 육바라밀(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에 다가 방편,원,력,지의 네 가지를 더한 것입니다.

 

십바라밀도을 설명하면

둥근달(滿月)아낌없이, 준다는 생각도 없이 나누어 주는 보시(布施)이며

반달(半月)계율을 잘 지킨다지계(持戒)이며 

신날(鞋經)어려움을 잘 참고 견딘다인욕(忍辱)이고,

가위(剪刀)는 물러섬이 없이 끊임없이 노력하는 정진(精進)이고,

 

구름참선삼매에 들어 간다 선정(禪定)이며,

금강저(金剛杵)는 번뇌를 깨뜨리는 지혜(智慧)이고,

좌우우물(左右雙井)상황에 맞는 방법을 사용한다방편이며,

전후우물(前後雙井)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맹세를 일으키는 원(願)이며,

두개의 고리(卓環二周)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힘써 나가는 력(力)이며,

별 가운데 둥근달(星中圓月)현실 속에서 문제의 해결의 방법을 제대로 파악하는 힘인 지(智)입니다.

 

 

십바라밀정진도(十波羅蜜精進圖) -  

             * 의상대사 법성게를 대입하여 넣는 그림인 해인삼매도(海印三昧圖)의 주변을 한

               바퀴 돌려 그린 것이 10바라밀도이다. 불교교리를 도안으로 나타낸 귀한 그림이

               며 큰 사찰에는 이 해인도(10바라밀도 포함)를 옥쇄와 같은 큰 도장(海印)으

               로 만들어 절의 상징물로 보존하였으며, 정초에 영사나 주사로 탁본을 하여 신

               도들이 부적을 요구할 때 방편으로 내 주었다.

                  맨 윗쪽에는 불,법,승 삼보를 뜻하는 점 세개를 넣은 원을 그려 부처님 모시는

               마음으로 잘 접어 지니거나 삼보 그림이 위로 가게 방문위에 붙여 두면 잡귀나

               재액이 범접하지 않는다고 하는 방편을 일러 주면서.    

 

 

 

 

 보살의 십행은 일체유심조의 경계이므로 중생이 본성대로 사는 것이 십행이다. 그 구체적 내용이 십바라밀로 전개되고 있다.




1)
환희행(歡喜行)에서는 보시바라밀을 구족하여 중생을 즐겁게 한다.

 보시행은 곧 즐거운 행이니 보살이 이 행을 닦을 때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하고 즐겁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 경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무엇이 보살마하살의 즐거운 행인가.
불자들이여, 보살이 큰 시주가 되어서 가진 것을 모두 베풀되 그 마음이 평등하여 뉘우치거나 아낌이 없으며, 과보를 바라지 않으며, 이름이 남을 구하지 않으며, 이양을 탐하지도 않는다.
다만 일체 중생을 요익되게 하며, 제불의 본래 수행하신 바를 학습하고 청정케 하며 증장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불자들이여, 보살이 이 행을 닦을 때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하고 애락하게 한다.

그래서 빈궁한 곳이 있으면 원력으로써 부호의 집에 왕생하여 시여해서 가난한 이들을 기쁘고 만족하게 한다.
수없는 중생들이 와서 구걸하더라도 보살은 물러나거나 겁내지 않고 더욱 자비심을 증장시킨다. 중생들이 와서 구걸하는 것을 보고 더욱 기뻐하며 생각하기를, "나는 좋은 이익을 얻고 있다. 이 중생들은 나의 복전이고 나의 좋은 벗이다. 구하지 않고 청하지 않았으되 찾아와 나를 불법 가운데 들게 하니, 내가 이제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고 닦아서 일체 중생의 마음을 어기지 아니하리라" 한다.

이처럼 보살은 중생들을 자신의 복밭〔福田〕이라 생각하고, 찾아와서 구하면 기뻐하며 시여하라는 것이다.
복전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 비전(悲田)과 은전(恩田)과 경전(敬田)을 들 수 있다.
보살은 만약 한 중생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지 않겠다고 원한다.
그리고 보시함에 있어서 분별상이 없다.
보살은 이처럼 중생을 이롭게 하지만 '나〔我〕'라는 생각 등 4상이 전혀 없다. 자기 몸도 보지 않고, 보시하는 물건도 보지 않고, 받는 이의 복밭도 보지 않으니 삼륜이 청정하다.
이와 같이 보살은 중생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주기 위하여 자기에게 있는 선근과 모든 재물을 다 희사하되 집착함이 없는 것이다.
자기도 환희롭고 중생들도 환희롭게 일체를 베푸는 것이 보시며, 보시함에 집착이 없는 행이 바라밀인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상에서 보시가 무슨 의미이며, 무엇을 보시하며, 어떻게 보시하며, 왜 보시하며, 보시하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보시바라밀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보시란 다른 이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뭘 베푸는가 하면 선근과 재물 등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베푼다.
환희까지도 베푼다.
어떻게 베푸느냐면 무집착으로 베푼다.
분별심이 없이 사상이 없이 베풀기 때문에 삼륜이 청정한 것이다. 왜 베푸느냐면 자신도 기쁘고 남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이다.
언제까지인가 하면 만약 한 중생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겠다고 한다. 그
래서 마침내 함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게 됨을 보이고 있다.



2) 요익행(饒益行)에서는 지계바라밀중생을 이롭게 한다.

경에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설하고 있다.

불자들이여, 무엇이 보살마하살을 이롭게 하는 행인가.
보살은 청정한 계율을 지니어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위세를 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청정한 계율을 굳게 지녀서 부처님께서 찬탄하시는 평등한 정법을 얻으려고 한다.
보살은 욕심으로 인해 한 중생도 괴롭히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끝내 중생을 괴롭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요익행의 보살은 중생들이 오욕에 탐착하며 거기서 헤매느라고 자유롭지 못하므로 중생들로 하여금 위없는 계율에 머물도록 하며, 그리하여 일체지에서 물러나지 않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무여열반에 들게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며, 스스로 해탈하고 남도 해탈케 하며, 스스로 열반에 들고 남도 열반에 들게 한다.
이 지계바라밀 역시 중생들이 본성대로 사는 중생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이처럼 보살은 자신만 제도해서는 보살이 아니다.
다른 중생들로 하여금 보시하고 계를 지니도록 해주어야 보살이다.
그래서 그 중생들도 다시 다른 중생들로 하여금 보시하고 계를 지니도록 해 주어야 바라밀행이 되는 것이다.
십바라밀 모두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을 위해서 중생들이 십바라밀행을 할 수 있도록까지 하여야 바라밀행이 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3) 무위역행(無違逆行)에서는 인욕바라밀중생을 어기지 않는다. 
 
사물의 이치를 수순하고 인내하여 중생을 어김이 없음이다.

보살은 항상 참는 법을 닦아 겸손하고 공경하여,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는다.
중생에게 법을 말하여 그들이 모든 나쁜 것을 여의고 항상 참고 견디며 화평하게 살도록 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참는 법을 성취할 때 남으로부터 온갖 나쁜 말을 듣거나 심지어 생명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면,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몸은 공적(空寂)하여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괴롭고 즐거움이 모두 없는 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공한 것을 내가 이해하고 남들에게 널리 말하여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나아가게 한다.



4) 무굴요행(無屈撓行)에서는 정진바라밀도에 정진하여 퇴굴함이 없어 굽히지 않는다.

보살은 성품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알므로, 한 중생이라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정진을 한다.

오로지 모든 번뇌를 끊기 위해 정진을 하고, 모든 의혹의 근본을 뽑기 위해 정진을 하며, 익힌 버릇들을 제거하기 위해 정진하며, 모든 중생계를 알기 위해 정진한다.
보살은 자신의 힘으로써 중생들을 영원히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며, 모든 세계에서 일체 중생에게 끝까지 무여열반을 얻게 한다.
이것이 네번째의 굽히지 않는 행이다.



5) 무치란행(無痴亂行)에서는 선정바라밀정혜가 바르고 밝아서 어리석음과 어지러움이 없다.

보살은 바른 생각을 성취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으며 미혹이 없다.

생각이 바르므로 세간의 모든 언어를 잘 알고 출세간법의 말을 할 수 있다.
 보살은 수많은 세월을 지내도 정법을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한다.

보살은 잠깐 동안에 수없는 삼매를 얻어 갖가지 소리를 듣더라도 마음이 산란치 않고, 삼매가 점점 더 깊어지게 한다.
예를 들면 사람을 몹시 두렵게 하는 소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소리, 마음을 기쁘지 않게 하는 소리, 귀를 시끄럽게 하는 소리 등도 보살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 못한다.
모든 음성을 사유 관찰하여 그 성질을 잘 안다. 그
리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청정한 생각에 편안히 머물러 일체지에서 물러나지 않고 마침내 무여열반을 성취하게 하리라.'
이것이 다섯째의 어리석음과 어지러움을 떠난 행이다.



6) 선현행(善現行)에서는 반야바라밀경계와 지혜가 훤출히 밝아 잘 나타난다.

보살은 몸으로 짓는 업이 청정하고, 말로 짓는 업이 청정하고, 생각으로 짓는 업이 청정하여, 얻을 것 없는 데에 머물러서 얻을 것 없는 몸과 말과 생각의 업을 보인다.
 
이 세 가지 업이 모두 없는 것인 줄 알며, 허망함이 없으므로 얽매임도 없다.

실제와 같은 마음에 의지하여 한량없는 마음의 바탕을 알며, 세간을 초월하여 의지할 데가 없다. 분별을 떠나 속박이 없는 법에 들어갔고, 가장 뛰어난 지혜의 진실한 법에 들어갔고, 세간에서는 알 수 없는 출세간법에 들어갔으니 이것이 보살의 선교방편으로 생기는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한다.
'이 중생이 성숙되지 못하고 조복되지 못했는데 그냥 버려두고 나만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중생을 교화하면서 무량겁을 두고 보살행을 닦아, 성숙하지 못한 이를 먼저 조복하게 하리라.'
이것이 여섯째의 잘 나타내는 행이다.



7) 무착행(無着行)에서는 방편바라밀중생을 포섭하되 집착이 없다.

 

보살은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순간마다 무수한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면서도 그 세계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

순간순간 많은 부처님을 뵙지만 부처님께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보살행을 행하면서도 부처님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보살은 법계에 깊이 들어가 중생을 교화하면서도 중생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보살은 이와 같이 집착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 안에 있으면서도 마음에 장애가 없어 부처님의 보리를 알고, 법의 계율을 증득하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머문다.
보살행을 닦고, 보살의 마음에 머물고, 보살의 해탈법을 생각하면서도 보살이 머무는 데에 물들지 않고 보살의 행하는 데에 집착하지 않고, 보살도를 청정하게 하여 보살의 수기를 받는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시방세계의 낱낱 국토에서 무량겁을 지내면서 교화하고 성숙하게 할 것이며, 이 한 중생을 위해서 하듯이 일체 중생을 위해서도 그와 같이 할 것이다.
끝까지 이 일을 위해 싫어하거나 고달픈 생각을 내어 그냥 버려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8) 난득행(難得行)에서는 원바라밀(願波羅蜜)대원을 성취하여 얻는다.

보살은 얻기 어려운 선근 내지 부처님과 성격이 같은 선근 등을 성취하였다.
보살이 모든 행을 닦을 때 불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해를 얻고, 부처님 보리에서 가장 넓고 큰 이해를 얻는다.
보살의 서원에는 조금도 휴식이 없고, 모든 겁이 다하여도 지치거나 게으름이 없으며, 온갖 고통에도 싫은 생각을 내지 않으며, 대승의 소원을 항상 버리지 않는다.

보살은 중생이 있는 것 아닌 줄 알지만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으며 중생의 수효에 집착하지 않는다.
한 중생을 버리고 많은 중생에게 집착하지도 않고, 많은 중생을 버리고 한 중생에게 집착하지도 않는다.
중생계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다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으며, 중생계를 분별하지도 않고 둘로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계와 법계가 같은 데에 깊이 들어가 중생계와 법계가 둘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을 위해 보살도를 닦으면서 그들로 하여금 안온한 피안에 이르러 위없는 보리를 이루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여덟째의 얻기 어려운 행이다
.



9) 선법행(善法行)에서는 역바라밀(力波羅蜜)힘으로 법을 설한다.

보살은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시원한 법의 못이 되어 바른 법을 거두어 지녀 부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한다.

보살은 일체 중생의 집이 되니 모든 선근을 기르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돌아갈 곳이 되니 큰 의지처를 주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스승이 되니 진실한 법에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등불이 되니 그들에게 업보를 환히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홉째의 법을 잘 말하는 행이니, 보살이 이 행에 머무르면 일체 중생을 위해 시원한 못이 되어 모든 불법의 근원을 다하게 된다.



10) 진실행(眞實行)에서는 지바라밀(智波羅蜜)진실한 행을 이룬다.

보살은 진실하고 참된 말을 성취하여 말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말한다.

보살은 삼세 부처님들의 진실한 말을 배우고, 부처님들의 종성에 들어가고, 부처님들과 선근이 같고, 여래를 따라 배워서 부처님과 같은 지혜가 성취되어 보살행을 버리지 않는다.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모두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다.
보살은 이와 같은 증상심을 다시 일으킨다.

내가 만약 일체 중생에게 무상 해탈도에 이르게 하지 못하고 먼저 위없는 보리를 이룬다면, 이것은 내 본래 소원을 어기는 일이니 마땅치 않다.
그러니 반드시 일체 중생에게 위없는 보리와 무여열반을 먼저 얻게 한 후에 성불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내게 청하여 발심한 것이 아니고, 내가 중생에게 불청객이 되어 일체 중생에게 선근을 쌓아 일체지를 이루게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십행위에서 보살이 십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그 바탕에 제법존재가 무상하고 공임을 철저히 인식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도 그림자 같으며, 보살행이 꿈과 같고, 부처님의 설법은 메아리 같은 줄 관하기 때문이다.


                                                           * 해인풍수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