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향(墨香)은 세월(歲月)과 더불어 그 향기(香氣)를 더해간다.
'상운봉월혈(祥雲奉月穴)'의 양택명당 추사 고택 조선시대의 서화가 문신 문인 금석학자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선생은 충남 예산군 신암면(新岩面) 용궁리(龍宮里)에 위치(位置)한 추사 고택에서 호조판서를 지낸 김노경과 기계 유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임신된 지 이십사개월이나 되어 태어났다 한다. 추사가 태어나는 날 향저의 뒷뜰에 있는 우물물이 갑자기 말라버렸고 후산(後山)인 용산의 원맥을 이루는 팔봉산(八峰山)의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추사가 태어나자 물은 다시 샘솟고 초목은 생기를 되찾았다 전해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사가 팔봉산의 정기(精氣)를 받고 태어났음을 알았다고 한다. 전설의 추사고택 우물 고택 앞으로는 낮은 구릉이 상서(祥瑞)로운 구름의 형상으로 넓게 펼쳐지고 좌우로는 오석산자락이 등을 받쳐주듯 형성되어 있다. 고택이 위치하고 있는 신암면 동쪽에 무한천(無限川), 서쪽에 삽교천(揷橋川)이 좌우에서 신암면을 감싸고 서해(西海)로 빠져나간다. 이 두 개의 개천 주위에는 들이 형성되고 개천 사이는 구릉이 형성되어 있는데 구릉 가운데에 용산(龍山)이 솟아 있고, 이 용산을 배경으로 추사 고택이 동향(東向)을 하고 있다. 이 고택은 추사 선생의 증조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에 의해 1750년경 건립되었다. 월성위 김한신은 영조의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영조의 사위가 된 인물이다. 추사는 서울 장동에 거주하면서도 이곳을 '용산서실(龍山書室)'이라 명명하고 자주 내려와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고택 아래쪽에는 왕자지라는 유서 깊은 연못이 있었으나 1940년경에 매몰되어 달이 떠 물에 비치는 광경을 보지 못해 아쉬움을 더하여 주고 있다.
추사는 약관(弱冠)에 이미 백가(百家)의 서(書)를 통달(通達)하였고 깊고 넓기가 바다와 같았다 한다.
추사는 13경(經)에 전심용력하여 특히 주역(周易)에 깊었다고 하며 금석(金石) 도서(圖書) 시문(詩文) 전례(篆隷)의 학(學)에 그 근원(根源)을 캐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 서법(書法)으로 천하(天下)에 이름이 났다고 그의 소전(小傳)은 전(傳)하고 있고 조선왕조실록은 "책을 많이 읽어 금석문(金石文)에 능했고, 그림과 역사에 있어서는 그 깊이를 꿰뚫을 줄 알았다. 글씨에 있어서는 참 경지에 이르렀다 그가 죽자 사람들은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유했다." 고 적었다. 선생(先生)의 '세한도(歲寒圖)'에도 보이듯이 그의 청고(淸高)하고 고아(古雅)하며 강인한 기백(氣魄)과 굳은 절개(節槪)의 선비정신은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券氣)를 손가락 끝으로 서화(書畵)로 표출되어 나타났으며 누구도 추종(追從)할 수 없는 독특한 필체(筆體)인 추사체(秋史體)를 창안(創案)하였다. 추사의 난 그가 태어난 고택(古宅)은 '상운봉월(祥雲奉月)의 혈(穴)'로써 정신적(精神的) 예술적(藝術的)인 지도자(指導者)를 낼 수 있는 대지(大地)이다. 선생(先生)의 예술사적(藝術史的) 지위(地位)는 고택 내(內)에 사당(祠堂)까지 위치(位置)하고 있어 역사(歷史)와 더불어 더욱 고양(高揚)될 것이다. 사당 입구 전경
지방의 토후로서 중앙에서 오랫동안 벼슬을 한 사대부들의 세거로 내려왔던 까닭에 충청도 서해안 지방에선 흔치 않은 완벽한 'ㅁ'자 구조의 집을 하고 있다. 원래는 99칸의 집이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솟을 대문의 문간채, 'ㄱ'자 평면의 사랑채, 'ㅁ'자형의 안채와 추사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옥이다.
이런 혈(穴)의 정기(精氣)를 받고 태어난 선생(先生)이 예도(藝道)와 선비정신의 귀감(龜鑑)으로 남는 것은 당연(當然)하리라 본다.
* 세한도 발문(跋文)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上有
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 금년우이우경문편기래 차개비세지상유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구지천만리지원 적유년이득지 비일시지사야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차세지도도 유권리지시추 위지비심비력여차 이불이귀지권리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내귀지해외 초췌고고지인 여세지추권리자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태사공운 이권리합자 권리진이교소 군역세지도도중일인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기우초연자발어도도 권리지외 불이권리시아야 태사공지언비야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공자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송백시관사시이불조자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세한이전 일송백야 세한이 후일송백야 성인특칭지어세한지후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금군지어아 유전이무가언 유후이무손언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언유전지군 무가칭 유후지군 역가견칭어성인야야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성인지특칭 비도이후조지정조경절이이 역유소감발어 세한지시자야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오호 서경순후지세 이급정지현 빈객여지성쇠 여하 박절지극의 비부 완당노인서
지난 해에 두 가지 晩學,大雲 책을 부쳐왔고, 금년에는 耕文編이라는 책을 부쳐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머나먼 천리 밖에서 구한 것이며, 여러 해를 거쳐 얻은 것이요, 일시적인 일이 아니다.
더구나, 세상의 도도한 물결은 오직 권세와 이익의 옳음만을 따르는데, 그것을 위하여 마음을 소비하고 힘을 소비함이 이와 같아,권력 있는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밖의 한 초췌하고 메마른 사람에게 주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따르는 것과 같구나.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교분이 성글어진다고 하였는데, 그대 또한 세상의 물결 속의 한 사람으로 초연히 스스로 도도한 물결에서 (몸을) 빼어 권세와 이익의 밖에 있으니 나를 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써 하지 않는 것인가? 태사공의 말이 그른 것인가?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와 잣나무<또는 측백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 고 하였다. 松栢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이 특히 세한의 후에 그 것을 칭찬하였는데, 지금 그대는 전이라고 더함이 없고, 후라고 덜함이 없구나.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거니와,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받을 만한 것 아닌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다만 늦게 시드는 정조와 경절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고 또한 세한의 시절에 느끼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아! 西漢의 순박한 세상에 급암, 정당시 같은 어진 이에게도
빈객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곤 하였으며, 하비의 방문같은 것은 박절이 극에 달하였구나. 슬프다!
완당노인 쓰다.
* 해인풍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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