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薯童謠 (서동요) / 百濟 武王

경성 성진 (鏡惺 聖眞) 2016. 6. 10. 16:58








薯童謠 (서동요)

 / 百濟 武王


善 化 公 主 主 隱  선화공주주은
他 密 只 嫁 良 置 古 타밀지가량치고

薯 童 房 乙  서동방을

夜 矣 卯 乙 抱 遣 去 如  야의묘을포견거여


선화공주니믄

그으지 얼어두고

맛둥방알

바매 몰 안고가다

* 양주동 해독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정을 통해) 두고,

맛둥(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善花公主니리믄

 그윽어러 두고

薯童 방알

바매 알할 안고 가다

* 김완진 해독

선화공주(善花公主)님은

남 몰래 짝 맞추어 두고

서동(薯童)방을

밤에 알을 안고 간다.


 


武王[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


第三十<武王>, 名<璋>.
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交通而生, 小名<薯童>, 器量難測.
常掘薯蕷, 賣爲活業, 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

美艶無雙, 剃髮來京師, 以薯蕷餉閭里羣童, 郡童親附之, 乃作謠, 誘羣童而唱之云: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卵乙抱遣去如” .
童謠滿京, 達於宮禁, 百官極諫, 竄流<公主>於遠方.
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公主>將至竄所, <薯童>出拜途中, 將欲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因此隨行, 潛通焉, 然後知<薯童>名, 乃信童謠之驗.
同至<百濟>, 出王后所贈金, 將謀計活, <薯童>大笑曰: “此何物也?”

<主>曰: “此是黃金, 可致百年之富” .
<薯童>曰: “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 .
<主>聞大驚曰: “此是天下至寶, 君今知金之所在, 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

<薯童>曰: “可” .於是, 聚金積如丘陵, 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

所, 問輸金之計, 師曰: “吾以神力可輸, 將金來矣” .
<主>作書, 幷金置於<師子>前, 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

<眞平王>異其神變, 尊敬尤甚, 常馳書問安否, <薯童>由此得人心, 卽王位.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 會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

[《國史》云<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
[《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


무왕(武王[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百濟에는 무강武康이 없다])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寡婦)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薯여]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生業)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혹은 선화善化])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善化公主)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童謠)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여

장차 떠나려 하는 데 왕후(王后)는 순금(純金)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우연히 믿고 좋아하니 서동은 그를 따라가면서 비밀히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가 맞는 것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母后)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고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이니 이것을 가지면 백 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덩이처럼 쌓아 두었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그대는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이다.

" 이에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이것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한다.

"내가 신통(神通)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 오시오."

이리하여 공주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師子寺) 앞에 갖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자

진평왕(眞平王)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밑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한다.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像)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塔)과 낭무(廊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삼국사三國史≫에는 이 분을 법왕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