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流景(풍류경)
/ 鏡虛惺牛(경허성우)
竺少林巒便去遊 축소림만변거유
畿廻復上彩雲樓 기회부상채운루
華陽無限風流景 화양무한풍류경
盡入萬東廟裡愁 진입만동묘리수
천축 소림의 메(처럼 생긴 곳이 많은 곳) 문득 가서 유람하면서
(그) 경계를 돌다가 채운루에 거듭하여 오르나니
화양동의 무한한 풍류경이
모두 만동묘 속으로 들어가 시름겹구나
* 解譯(해역) : 鏡惺 聖眞 (경성 성진)
■ 華陽(洞) 화양(동)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청천면(靑川面) 화양리(華陽里) 지역.
조선 효종 때 송시열이 한거(閑居)하던 곳이다.
■ 竺少林巒 축소림만
천축(인도)의 소림의 메(봉우리) 처럼 (생김)
~ 불도 수행하기 적합한 곳
¤ 畿廻復上彩雲樓 기회부상채운루
(그) 경계를 돌다가 채운루에 거듭하여 오르나니
° 경허 선사님께서는 왜?
~ 이국적 풍경에 매료되었다기 보다는
아직도 이렇게 수행하기 좋은 터가 있다니 감탄하심
■ 萬東廟 만동묘
인조 때 청나라를 다녀온 민정중이 구해온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글씨 한 폭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자 이글을 보고
의종이야 말로 예(禮)를 지켜낸 최고의 군주로 칭송하였다.
존명 사대주의 사상에 열렬했던 송시열은 이를 받고서
이 글을 화양동 석벽(石壁)에 새겨 놓고
석벽 위에 공부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송시열이 죽을 때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이곳에 묘우(廟宇)를 지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도록 하여
권상하가 유림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묘에 딸린
전토(田土)와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에는 묘를 중수하였으며
면세전(免稅田) 20결(結)을 주었다.
1809년(순조 9)에는 묘우를 개축하고
1844년(헌종 10)에는 정식으로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 묘는 노론(老論)의 소굴이 되어
상소와 비판을 일삼았고,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양민을 토색하는 등
민폐가 심하여,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扁額) 등은
서울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 11) 다시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조선시대 후기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4대 서원으로 유명하였으나,
노론(老論)세력의 본산으로 화양서원이 행한 병폐가 극심했다.
지금은 복구되어 있고
만동묘정비가 지방기념물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 윗글 출처 : (두산백과)
¤ 盡入萬東廟裡愁 진입만동묘리수
모두 만동묘 속으로 들어가 시름겹구나
° 선사님께서는 왜 시름겨우셨나?
수행하기 적합한 화양동의 좋은 기운의 터에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이미 들어서있고
당시 만동묘와 (화양서원에) 기거하는
유림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양민들을 토색하는 등
민폐만 일삼았으므로
□ 華陽書院 화양서원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한 서원으로,
1696년(숙종 22) 9월 사액(賜額)을 받았다.
당시 서원 중에서도 가장 유력하였으며,
횡포가 가장 심해 제멋대로 발행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 때문에 폐해가 컸다.
묵패란, “서원에 제수전(祭需錢)이 필요하니
아무 날 아무 시간까지 얼마를 봉납(奉納)하라.”는 식의
고지서(告知書)에 묵인(墨印)을 찍어
군(郡) ·현(縣)으로 발송하는 것이지만,
이 묵패를 받은 자는 관(官) ·민(民)을 가리지 않고
전답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다.
만일 불응하면 서원으로 잡혀가서 공갈 ·협박을 받고,
사형(私刑)을 당하였다.
화양서원의 이런 행패가 극심하여
흥선대원군 이전에도 여러 번 단속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858년(철종 9) 7월에는 영의정 김좌근의 주청(奏請)으로
화양서원의 복주촌(福酒村)을 영구히 철폐시키라는 영이 내려졌다.
그것은 이 부락에 있던
지정음식점 같은 주호(酒戶)에도 불가침의 특권이 주어져서,
돈이 있는 요역기피자들이 이곳에 모여서
나라는 그만큼 피해를 보고
가난한 백성들만이 그 역을 대신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 1862년 3월에는 이곳 유생들이
원우(院宇)를 수리 ·개축한다는 명목으로
협잡배들과 전라도 지방에까지 출몰하여
재물을 거두어들여서 물의를 일으켰다.
이때에도 역시 김좌근의 주청으로 금지되었다.
이 서원은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
~ 윗글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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